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103:22)


‘나’는 누구인가? 아니 무엇인가? 육체인가? 정신인가? 생각인가? 마음인가?

육체는 한계가 있다. 어렸을 때에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판단하기가 어렵고, 성장을 하면서도 그 나이에 필요한 활동을 하느라 도무지 ‘나’를 돌아보기가 어려웠다. ‘나’는 무엇이기에 ‘내 영혼’을 부르고 있는가? ‘나’는 따로 있고 ‘나의 영혼’은 또 다른 존재인가?

MY SOUL…

‘나의 영혼’은 어떤 존재인가? 아니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내 육체는 숨을 쉰다. 물도 필요하고, 영양분도 필요하고, 근육도 필요하고, 쉼도 필요하고, 잠도 필요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다. 그것들을 관리하기 위해 또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옷도 필요하고, 신발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하고, 자존심도 필요하고…그러면서 늙어간다. 힘도 없어지고, 알던 지식은 점점 사라지고, 귀찮아지는 것은 점점 많아진다. 기능이 점점 약화가 된다. 그리고는 사라진다. 없어진다. 한 줌의 흙으로…

그렇다면 육체는 한계가 있다. 능력에도 한계가 있고, 존재하는 기간도 한계가 있다. 그 기간도 점 하나에 불과하다. 너무나도 미미하다. 무엇으로 내 육체를 평가할까? 기껏해야 8~90년. 좀 더 산다 해도 120년? 그 기간은 뭘 의미하는가? 남들보다 3~40년 더 산다 한들 정신줄을 놓고 병원신세 나라신세 가족들에게 신세를 지면서 산다면 그건 또 무슨 의미인가? 사는 동안 무엇을 해 놓았다고 한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사업을 이루어 놓았던 들 나에겐 무엇이고 자식에게 또는 다른 이에게 넘겨준 들 그것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나와 맺었던 많은 사람 들과의 관계는 무엇인가? 아내는 무엇이며 부모와 자식은 또 무엇인가? 하물며 친지와 친구, 사업상의 수많은 인간관계는 무엇인가? 왜 그토록 분쟁과 시비를 안고 사는 것일까? 그들과의 경쟁에서 꼭 이겨야만 하는가? 그래야 잘 살았다고 인정받는 것인가?

도대체 ‘인간’은 왜 사는 걸까? 육체로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라면 살 의미가 정말 없다. 그냥 흙으로 돌아 간다면 두 살 때 가는 것이나 백 살 때 가는 것이나 무슨 차이일까? 몇 년 더 살았다 한들 그게 뭔가? 수많은 모래들에게 너는 언제부터 모래가 되었느냐고 물어볼까? 한 모래는 “바위였다가 20년 전에 부숴져서 이렇게 되었다.” 하고, 다른 한 모래는 “자갈로 70년 살다가 엊그제 모래가 되었소.” 라고 한다면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금은 ‘그냥’ 둘 다 모래인 것을…

그래! 인생은 육체만이 아닐 것이다. 인간은 분명히 육체만이 아니다. 생각, 마음, 의지, 뜻…이것들 또한 형태만 없을 뿐 ‘인간’을 덮고 있는 부품인 것 같다. 왜? 인간이 마지막을 고할 때 모두 다같이 없어지니까. 그렇다면 인간을 빚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설명을 하실까? 코에 생기(창2:7)? 창조하실 때 생기를 부어 주심은 단순히 육체적 호흡 인가? 숨쉰다. 코, 기관지, 허파로. 그런데 그것들도 육체가 죽으면 같이 끝난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전3:11)? 영혼? 그런데 안 보인다. 영혼이 있다는 근거가 뭘까? 보이나? 만질 수가 있나?

성경에서 그 근거를 찾았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03:22)

그렇다!

여호와를 송축하는 역할과 기능과 사명이 ‘영혼’에게 있다. ‘내 영혼’에게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 이신가? 스스로 계신 분. 우주만물의 주인. 창조주. 인생들에게 육체도 주시고 호흡도 주시고 죽음도 주시고 부활도 주신 분. 나의 구세주이시며 나의 왕이시며 나의 생명이신 분. 그 분을 인정하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이 ‘여호와를 송축하라’이다. 여호와를 송축할 때에 ‘나’에게 ‘내 영혼’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여호와를 모르거나, 알아도 송축을 안 하거나 못 한다면 영혼은 없는 존재인 것이다. 죽은 영혼이고 하나님과 관계없는 인간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혼이 없는 인간, 영혼이 죽은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고, 알아도 믿을 수 없고, 말씀이 믿어지지 않으니 송축을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를 송축’일까?

Praise the LORD. 여호와를 찬양하라. 찬송가를 부르기만 하면 찬양인가? 곡조만 흥얼거린다고 송축인가? 입만 뻥긋뻥긋 한다고 찬양인가? 아니다.

여호와를 높여 드리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

생각도 말도 행동도 하나님을 가장 먼저 가장 높게 해 드리는 것. 이것이 ‘여호와를 송축’이다. 잠을 자다 가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잠에서 깨어 나자 마자 “하나님! 감사합니다.”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송축’이다.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 묵상으로 열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아침이 ‘여호와를 송축’이다.

그리고는 실천이다. 준행이다. 행함이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약2:26) 효도, 우정, 정직, 사랑...수많은 추상명사를 보라. 행함이 없이 머리로만 아는 단어, 입으로만 표현하는 단어는 그야말로 단어에 불과하다. 따라서 모든 추상명사는 동명사이어야 한다. 행함의 기능이 없다면 명사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특히 ‘말씀의 행함’이 우리를 우리되게 하신다.

‘말씀의 행함’. 교회안에서는 비교적 이루어지기가 쉽다.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가정에서는 어떤가? 나의 피붙이들에게도 애정을 표하지 못하면서 도대체 누구에게 친절하고 누구에게 호의를 베푼 단 말인가? 아내에게 자존심을 양보하지 못 한다면 누구에게 흐트러진 내 모습을 보인다는 말인가? 여기서부터 행함의 사역이 시작된다. 여기서 주춤대는 사역은 동력을 내기 어렵다.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은 완연히 다르다. 신앙생활은 나의 삶 그 자체이다.

그리고는 ‘말씀의 선포’이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딤후4:2),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겔3:11)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삶이 ‘여호와를 송축’이다. 몸과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께 집중하며 살아 갈 때에 내 영혼이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145:1)

‘내 영혼’의 존재 이유이시며, 존재 목적이시며, ‘내 삶’의 최고 가치가 되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찬양합니다.

2021.2.22

주수학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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