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과 기독교인




기독교인은 누구인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인가? 여기서의 ‘다니다’는 무슨 의미일까?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 종교를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나는 기독교인입니다’라고 대답을 하면 기독교인인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읽고, 안 배우고, 그래서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기독교인인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다 보니 아브라함도 알고, 다윗도 알고, 삼손도 아는 같기도 하고, 예수님 이야기도 알고, 헌금도 하는 편이다. 그러면 기독교인인가?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를 판단할 자격은 없다. 남을 지적하고 판단할 이미 교만의 영역으로 빠져 들어간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이라.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약4:11) 그렇다. 비방이나 판단은 하지 말자. 그러나 성경대로 살자고 권면은 하자. 가르치고 지키게 하자. 말씀선포는 성경을 믿는 모든 이들의 책임과 의무요 예수님의 명령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20) 말씀선포는 강대상에서만 하는게 아니다. 20분, 30분씩 별도의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좋다. ‘첫째는 이렇고, 둘째는 이렇고’ 하면서 기승전결의 격식을 갖출 여유가 없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하고 만난다. 그리고 대화를 한다. 그때다. 상대가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우리의 ‘일상’에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숨겨져 있다. 그리고는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로 나타난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아픔이 오기도 하고, 때로는 나의 실수나 부주의에 의한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일들을 무의식 중에 또는 습관적으로 사단의 짓이라는 결론으로 오류를 범한다. 추운 날씨에 제대로 옷을 챙겨 입지 않고 길거리에서 벌벌 떨었다. 그래서 감기에 걸렸다. 이것이 사단의 공격인가? 교회를 향하여 부지런히 차를 타고 달려오다가 신호위반으로 걸렸다. 예배시간에 늦었다. 이것도 사단의 방해인가, 나의 잘못인가? 내 탓인데 사단에게 돌린다. 주일예배를 드리느라 사업상 손해가 생겼다. 사단의 짓인가? 아니다. 나의 이익보다 주님을 위한 정직함이 피해를 불렀다면 이는 경건한 부담감이요, 세상이 없는 하늘의 선택인 것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감당하는 기독교인의 당당함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멋이 있어야 한다. 풀무 불에서도, 사자 굴에서도 초대교회 선진들은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위하여 죽음을 맞이하였다. 결코 사단의 세력이 무서워서 피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으로 알고 묵묵히 받아들였다.

전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사단의 작품인가, 인간들의 자업자득인가, 하나님의 뜻인가? “미국, 교회, 그리스도인--이들에게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단언한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사람들이 사단에게 넘긴다. 필요 이상으로 사단을 두려워한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게는 있다. 미움을 주고 질투를 주고 게으름을 주고 그래서 분열을 조장하고 신앙심을 훼방한다. 방해한다. 의의 길을 향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속삭인다. 그 길이 아니라고. 넓은 문으로 가자고. 순탄하게 가자고. 돈이 최고라고. 음란과 마약과 도박으로 쉽게 살자고. 끝내는 지옥으로 안내한다. 이번 사태에 사단의 역할은 음모론이다. 불신을 끈질기게 이어 놓는다. 거기에 자칭 기독교인들이 부화뇌동한다. 예방접종, 치료제 개발, 면역체계, 병원시설 확충, 치안 행정지원 등의 조치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의 산물이다. 사단은 여기에 손을 댄다. 다만 의심케 한다. 이간질로 거짓말로 사람의 마음을 혼미케 한다. 음모론은 여기서 출발한다. 못 믿겠다. 백신도 부작용이 것이다. 어느 거대한 조직이 배후에 있다. 이번 사태를 이용하려는 정부를 믿겠다. 이런 식이다. 성경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19)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는 자들이다. 교회에 다니기만 하는 자들이다. 말씀의 능력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음모론은 질서의 하나님을 거스른다. 사단의 잔꾀를 신뢰하는 모양새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자. 하나님이 훨씬 크신 분이라고. 비교할 없다고. 그것이 ‘일상’에서의 말씀선포이다. 사단을 대적하는 길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하나님의 징계인가? 아니다. 회개를 위한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표현이다. 미국,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회개하라. 마지막 시대에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어떻게 살까?


첫째, 환경오염에 의한 기후변화는 심각의 수준을 넘어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빙하와 밀림은 급속하게 줄어가고 있다. 경제발전이라는 바벨탑은 기후재앙을 재촉했다. 지구는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1:31) 인간의 탐욕으로 지구가 죽어간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연에게 필요한 백신이다. 밀림과 빙하 속에 자리하고 있던 바이러스들이 이상 참을 없어서 인간에게 경고한다. 자연 파괴를 멈추지 않으면 멸망으로 간다고 절규한다. 이 현실을 미국은 안다. 아주 알고 있다. 미국의 회개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구를 죽이는 죄. 이 죄는 인류를 죽이는 죄이다. 이 죄는 말씀을 거역하는 죄이요,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죄악이다. 국방 예산보다 중요하다. 관련 연구기관에 인력증원과 재정지원을 아끼지 말라. 환경오염의 원인이 되는 각종 산업을 무공해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


둘째, 사랑이 식어간다. 이는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교회와 멀어지고, 말씀과 멀어진다. 믿음과 멀어진다. 가족도 멀어진다. 윤리도 멀어지고, 상식도 멀어진다. 나의 편안함이 최우선이다. 내가 불편하면 공격한다. 각 나라의 경제개발경쟁은 인간사회를 약육강식의 전투장으로 만들었다. 인종차별, 증오범죄, 성폭력, 총기사고는 줄일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서자.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수천만 달러 수억 달러를 들인다. 건물의 유지와 보수를 위해서 매달 엄청난 금액이 지출된다. 목사, 신부들에게 주어지는 사역의 기준은 무엇일까? 교회건물의 크기, 교인의 숫자, 살고 있는 주거환경, 가족의 안락함이 그들의 목적일까?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회개는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는 교회건물의 크기와 교인의 숫자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리심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장소 불문, 인원수 불문이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내가 사는 곳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주변이 전도의 대상이고 사랑의 대상이다. 나눔과 돌봄과 섬김의 실천이 여기서 이루어 진다. 예수님의 성품을 나의 인격이 되게 하는 절호의 기회이다. 국가가 일, 교회가 일, 내가 일이 따로 있다. 더 이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럽게 하지 말자. 그런 교회, 그런 목사, 그런 성도가 되지 말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말씀 묵상, 말씀 실천, 말씀 선포. 이렇게 살다가 죽자.

2021.4.13 수학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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